한 자 한 자에 시간을 새기던 사람 — 필경사의 조용한 기록
“한지 위에 먹을 올리고 붓을 들면, 마음부터 가라앉았지요. 글자를 베끼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옮기는 일이었으니까요.”복사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글 한 줄을 복사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이 필요했지요.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를 베껴 쓰던 그 사람들. 오늘은 조용한 방에서 시대를 기록했던 사람들, 필경사(筆耕士)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 잊혀진 손글씨의 시대필경사란 말 그대로 ‘붓으로 경작하는 사람’, 즉 글을 써서 생계를 잇는 직업인이었습니다.주된 업무는 문서를 옮겨 쓰는 일. 지금의 공무원 기록 담당자, 인쇄소 복사기, 심지어 문서 디자이너의 역할까지도 이들이 도맡았죠. 특히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 한동안까지도 관청, 법원, 학교, 출판사 등..
2025. 4. 17.
실 한 가닥에 삶을 짜던 사람들 — 베틀짜기 장인의 조용한 시간
🌿 “베틀 위에 앉으면,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무늬 하나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었으니까요.”전통 가옥의 안채, 햇살이 비치는 마루 끝자락. 그곳엔 언제나 베틀이 놓여 있었다. 실을 엮고 무늬를 짜던 손길은 느렸지만 단단했고, 그 손끝에서 이불이, 옷감이, 그리고 한 가정의 계절이 만들어졌다. 이 글은 ‘한 땀 한 땀’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장인들, 바로 베틀짜기 장인에 대한 이야기다. 🪡 집안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베틀 소리지금은 ‘전통공예’로 분류되지만, 예전에는 베짜기가 일상이었다. 특히 농번기가 끝난 겨울, 여성들은 실을 잣고 베틀 앞에 앉아 옷감과 이불감을 짰다. 면직물이나 모시, 삼베 등 지역마다 짜는 소재는 달랐지만, 그 방식은 놀랄 만큼 비슷했다. 실을 걸고, 북을 넣고, 발을 굴..
2025. 4. 15.
“작은 조각 속에 밤하늘을 새기던 사람들—자개장 세공사의 손끝에서 빛난 전통의 미학”
🌌 빛나는 조각, 사라진 손기술한밤중, 얇은 달빛처럼 반짝이던 장롱 앞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그 장롱의 문짝 위엔 구름이 흘렀고, 학이 날았으며, 꽃이 피었다. 검은 나무판 위에 수놓인 은은한 무늬—그게 바로 자개다. 그리고 그 자개를 하나하나 정성껏 붙이고 새기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우리는 자개장 세공사라 불렀다.자개장이란 조개껍데기의 속껍질을 얇게 가공해 목가구에 장식하는 전통 공예 기법이다. 흔히 자개장이라고 부르는 장롱, 반닫이, 문갑, 화장대 등은 모두 이 자개 세공의 결정체였다. 조각조각 빛나는 자개를 오려내고, 정교하게 붙이고, 그 위에 손으로 무늬를 새기던 자개장 세공사는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의 안방 문화를 빛내온 장인들이었다. 🛠️ 조개껍데기를 다듬는 손, 세월을 새기는 기술세..
2025.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