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틀 위에 앉으면,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무늬 하나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었으니까요.”
전통 가옥의 안채, 햇살이 비치는 마루 끝자락. 그곳엔 언제나 베틀이 놓여 있었다. 실을 엮고 무늬를 짜던 손길은 느렸지만 단단했고, 그 손끝에서 이불이, 옷감이, 그리고 한 가정의 계절이 만들어졌다. 이 글은 ‘한 땀 한 땀’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장인들, 바로 베틀짜기 장인에 대한 이야기다.
🪡 집안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베틀 소리
지금은 ‘전통공예’로 분류되지만, 예전에는 베짜기가 일상이었다. 특히 농번기가 끝난 겨울, 여성들은 실을 잣고 베틀 앞에 앉아 옷감과 이불감을 짰다. 면직물이나 모시, 삼베 등 지역마다 짜는 소재는 달랐지만, 그 방식은 놀랄 만큼 비슷했다. 실을 걸고, 북을 넣고, 발을 굴러 실을 고르고 다시 북을 넣는, 단순하지만 정교한 동작의 반복.
베틀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가족을 위한 옷감과 이불, 혼수품과 제사용 천까지, 거의 모든 섬유 제품이 이 손기술을 거쳐야만 했다. 그래서 베틀을 다루는 여성은 ‘한 집안의 산업’이자 ‘살림의 근본’을 책임지던 존재였다.
🧶 실 한 올에 깃든 정성
베틀을 짜기 위해선 먼저 실을 마련해야 했다. 목화솜을 타래로 잣는 일부터 시작해, 그 실을 골고루 뽑고, 얼기설기 걸어 베틀에 끼우는 일까지 모두 수작업이었다. 실이 꼬이면 전체 무늬가 어긋나고, 장력이 고르지 않으면 옷감이 울거나 찢어졌다. 말 그대로 한 올 한 올이 정교하게 이어진 기술의 결정체였다.
또한, 장인의 손은 단지 기술자이기 이전에 ‘디자이너’였다. 꽃무늬를 넣을지, 선을 그릴지, 색을 어떻게 배치할지는 모두 그들의 감각에 달려 있었다. 짜임의 텐션, 실의 감촉, 색상의 조화… 모든 것이 장인의 눈과 손을 거쳐야만 했다.
🏡 여인들의 베틀방, 소리로 짜여진 공동체
흥미로운 건, 베틀 작업은 종종 마을 단위의 공동체 활동이었다는 점이다. 겨울이면 마을 여성들이 모여 ‘짜는 소리, 북소리, 웃음소리’가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었다. “이 실은 누구네 딸 시집갈 때 쓰려고 해”, “이건 제사 때 덮을 보자기 짜는 거야”라며, 실 위엔 사연이 얹혔다.
그러다 보니 베틀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닌, 정서적 공간이자 여성들의 사회적 연결망이었다. 바깥세상이 험하던 시절, 그 좁은 방 안에서 삶의 고민을 나누고 기쁨을 짰던 기억은, 지금도 나이든 어르신들의 입가에 미소를 남긴다.
📉 사라진 직업, 잊혀진 무늬
산업화가 찾아오며 이 전통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천은 값싸고 빠르게 공급됐고, 베틀은 ‘느린 기술’로 밀려났다. 아파트 문화가 자리 잡으며 마루는 사라졌고, 베틀을 놓을 자리는 더 이상 남지 않았다.
현재 국내에서 전통 직조를 이어가는 장인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국가무형문화재나 전통문화재단에서 맥을 잇고 있지만, 일상에서 베틀을 짜는 집은 거의 전멸에 가깝다. 그나마 남아 있는 베틀도 민속촌이나 전시 공간 속에 머물고 있다.
🧵 “무늬는 손에 있고, 손은 기억한다”
하지만 베틀짜기 장인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빠른 것에 익숙한 지금, 그 느리고 정직한 기술은 속도보다 깊이 있는 삶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천 하나에도 의미를 담고, 사용자를 떠올리며 짜내던 그 정성은 오늘날의 디자인, 예술, 심지어 노동의 본질에까지 질문을 던진다.
“그때는 실이 부족해도 마음은 풍성했어.”
어느 장인의 말처럼, 베틀 위엔 실만이 아니라 정성, 사랑, 바람, 기억이 함께 얽혀 있었다.
베틀짜기 장인은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삶을 짜고, 기억을 엮고, 가족의 계절을 만들어낸 조용한 예술가였다.
그 손끝에선 천이, 그리고 역사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