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위에 먹을 올리고 붓을 들면, 마음부터 가라앉았지요. 글자를 베끼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옮기는 일이었으니까요.”
복사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글 한 줄을 복사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이 필요했지요.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를 베껴 쓰던 그 사람들. 오늘은 조용한 방에서 시대를 기록했던 사람들, 필경사(筆耕士)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 잊혀진 손글씨의 시대
필경사란 말 그대로 ‘붓으로 경작하는 사람’, 즉 글을 써서 생계를 잇는 직업인이었습니다.
주된 업무는 문서를 옮겨 쓰는 일. 지금의 공무원 기록 담당자, 인쇄소 복사기, 심지어 문서 디자이너의 역할까지도 이들이 도맡았죠. 특히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 한동안까지도 관청, 법원, 학교, 출판사 등 곳곳에서 필경사의 손길은 필수였습니다.
그들이 써 내려간 건 법령, 판결문, 족보, 계약서, 졸업장, 사설 문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한 자라도 틀리면 효력이 무효가 되는 문서였기에, 단순한 글씨쟁이가 아니라 정확성과 책임감을 요구받는 전문가였죠.
✍️ 손끝에서 태어난 세상
필경사의 하루는 조용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고 붓끝을 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는 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글씨는 일정해야 했고, 먹의 농도는 줄마다 균일해야 했으며,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조차 일정해야만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었죠.
일부 필경사들은 서예가처럼 미적 감각도 요구받았습니다. 문서에 따라 다른 서체를 구사해야 했고, 때로는 문서 상단에 ‘서문’을 예쁘게 장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필경사는 문서의 품격을 높이는 존재로서 인정을 받았고, 명문서당 출신이라는 이름이 따라붙기도 했습니다.
🏛️ 공적 기록의 수호자
사람들이 필경사를 ‘단순한 필기자’ 이상으로 여긴 건, 그들이 문서의 가치와 정당성을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 족보의 계보가 틀어지면 한 가문의 명맥이 뒤틀리고,
- 판결문이 잘못 쓰이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 시험지나 졸업장이 틀리면 아이들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었죠.
이렇듯 글자 하나가 운명을 결정짓던 시절, 필경사는 그 무게를 온전히 손끝에 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실력 있는 필경사는 종종 '문서의 수호자' 혹은 '글로 먹고 사는 장인'이라 불렸습니다.
📉 기술의 발전, 손의 퇴장
하지만 필경사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퍼진 타자기와 복사기는 글을 쓰는 ‘속도’의 경쟁에서 손글씨를 밀어냈습니다. 이어 워드 프로세서와 프린터의 등장은 정확도와 효율 면에서도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했죠.
1970년대가 되자, 관공서와 인쇄소에서 일하던 필경사들은 하나둘씩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남아 있는 이들은 서예로 전향하거나 개인 사무 보조 일을 하기도 했지만, ‘필경사’라는 명칭 자체가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은 일부 전통 서예가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거나, 박물관 등지에서 필사체험으로 재조명되고 있을 뿐입니다.
🖋️ 글씨는 사라져도, 손의 기억은 남는다
하지만 필경사의 세계는 여전히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정확함, 집중력, 인내심, 그리고 글자에 마음을 담는 기술.
지금 우리가 쓰는 문서의 틀, 포맷, 문서 디자인의 개념조차도 필경사의 손에서 시작되었지요.
한 장의 한지 위에 먹을 찍고, 붓을 눕혀 정성껏 글자를 써내려가던 그 감각. 그것은 단지 문자 전달이 아닌, 한 시대의 사유와 태도를 담은 방식이었습니다.
필경사는 단순히 글씨를 옮겨 쓰는 직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록을 책임지고, 글자를 디자인하며, 시대의 흐름을 손끝으로 되새긴 조용한 장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흔적은 우리의 글쓰기, 문서 양식, 심지어 서체 안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