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돌뱅이'라는 유랑 상인을 통해, 시장이 없던 시절 사람들의 삶을 실어 나르던 유동 장터의 의미와 그 따뜻한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 골목에 울려 퍼지던 ‘징그랑 징’
한때 시골 마을 어귀나 외진 산동네에서는, ‘징그랑~ 징’ 하는 소리에 아이들이 문을 열고 뛰쳐나오곤 했습니다. 허름한 천 보자기를 둘러멘 어깨, 닳아버린 고무신, 손에 쥔 쇠징 하나. 그는 장돌뱅이였습니다. 정식 상점도, 간판도 없이 작은 물건 몇 가지를 들고 마을을 떠돌아다니던 이들. 비누, 바늘, 고무줄, 머리삔, 과자, 간단한 약초까지. 필요한 건 뭐든 다 있었던 작은 이동 상점이었죠. 그들이 도착하면 잠시나마 마을엔 북적이는 기운이 감돌았고, 작은 골목이 장터로 변했습니다.
🔹 걸어서 다닌 하루 장사
장돌뱅이들은 대부분 일정한 판매 코스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마을을 돌았습니다. 교통이 열악했던 시절, 오지로 들어가려면 온종일 걸어야 했고, 짐이 무겁거나 비가 와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산 하나를 넘어야 다음 마을이 나왔고, 쉬는 날 없이 떠돌며 생계를 이어갔죠. 어떤 장돌뱅이는 산길을 10km 넘게 걷고 나서야 첫 손님을 만났다고 회상합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존재였습니다. “언니~ 삔 왔어?” “아저씨, 달달한 엿은요?”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짓는 순간, 피로는 잠시 사라졌습니다.
🔹 물건보다 반가운 얼굴
장돌뱅이들이 단지 물건만 팔았다면 이토록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외진 마을의 유일한 정보통이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친구였습니다. 어떤 이는 아이에게 과자를 쥐여주며 아픈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또 어떤 이는 젊은 아낙에게 서울 구경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물건을 사지 않아도 누구든지 환영했고, 삶의 짧은 쉼표 같은 존재였습니다.
정선의 한 노인은 말합니다. “요즘은 TV에 뉴스가 다 나오지만, 그땐 장돌뱅이 아저씨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줬어. 없던 물건보다 그 사람이 더 그리워.”
그 말 속엔, 단순한 상인을 넘어 마을의 풍경이었던 한 사람의 자리가 있습니다.
🔹 종소리가 멈춘 자리
1990년대 이후, 교통이 발달하고 마트와 편의점이 들어서면서 장돌뱅이의 자리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외지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더는 특별하지 않게 된 시대. 이제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삶의 방식과 관계의 온기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필요한 것을 들고 직접 찾아가고, 얼굴을 마주하며 정을 나누던 시간. 그 시대의 장돌뱅이는 단지 상인이 아니라, 움직이는 이야기꾼이자 관계의 메신저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느새 골목 어귀에서 들리던 쇠징 소리는 멈췄지만, 그 울림은 우리 마음 어딘가에서 여전히 ‘징그랑’ 하고 울리고 있는 듯합니다.